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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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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도자립센터 작성일08-12-24 19:19 조회8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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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설화와 탈시설화를 혼동하고 있는 듯









2007년도가 장애인 분야에서 법제정에 따른 획기적인 한 해였다면, 2008년도는 법이 집행되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이 시행되는 순간, 장애인 현장은 환호성이 대단했다. 마치 차별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러나 조용하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장차법이 2008년 키워드였다고 하지만, 비장애인들은 장차법의 이름조차 알고 있는가? 매스컴에서 장차법은 얼마나 언급되었을까?




이 뿐이 아니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통과됐지만, 그 법이 효력을 발행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교육과학기술부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부서에 관련된 법이지만, 동태는 보이지 않는다. 의무교육. 빛 좋은 개살구였는가?




2008년.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추진할 힘이 필요할 것 같아서 국회의원도 확실하게 밀어줬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는 고민한다. 2008년도 희망이 있었는가?




그 희망의 존재 자체, 흔적으로 상실했는가?




게다가 뭔지모르는 제도가 특툭 튀어나오고 있다. 그것이 바우처(Voucher) 제도이다. 게다가 치료바우처 제도이다. 치료라? 그 말은 'Therapy'일찐대, 다시 말하면 방법, 요법인데, 과연 국가자격증에 의하여 검증된 치료사는 누구인가? 결국 물리치료사와 작업치료사이다. 특수교육법에서는 치료라는 말이 사라지고 관련 서비스(related services)로 명명했다. 게다가 장애인 복지현장의 패러다임은 재활패러다임(Rehabilitation Paradigm)에서 독립생활 패러다임(Independent Paradigm)으로 변화하고 있다. 더이상 전문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차원으로 변화됐다.




아직 치료라는 말의 의미도 불확실하고, 치료영역도 불명확한 상태에서 난잡하게 분산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다다익선, 많은 치료를 많이 받으면 좋다는 생각(?)'에 의하여 이러한 제도가 생겨나온 것 같다. 붕명히 치료바우처는 부모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제도이지만, 과연 장애가 치료의 대상인지, 또한 치료영역은 무엇이며 누가 적격성을 가지고 치료서비스를 제공할 사람인지 혹은 분야인지도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제도는 시행되고 있다.




벌써 다른 한편에서는 '바우처 깡'(치료사사 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이용자와 치료비용을 부분씩 나누어 갖는다는 말)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누가 관리할 것인가? 바우처 제도의 부정적인 면을 누가 지적하며, 이에 대한 관리방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장애인을 위한 것인지, 장애인 부모를 위한 것인지, 장애인 관련 종사자이 고용창출을 위한 것인지 모호하다. 그 방향성과 목표를 알 수 없다.




게다가 장애인 현장은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탈시설화' 과연 이 땅에 현존하는 시설은 다 무의미한 것인가? 시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미인가 시설에도 장애인들은 수용되어야 하는가? 무시설화와 탈시설화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무시설화가 아니라 탈시설화요, 시설의 개방화와 소규모화, 그리고 시내 중심가에 시설을 배치하는 것 나아가 시설과 지역사회와의 통합인 중요한 것은 아닌가?




하여튼 우리 사회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한가지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게다가 장애인 판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놀음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들의 역량은 커지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대란의 현장에서 장애인 인권과 복지정책은 현 정부에서 일단은 후순위로 밀린 느낌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장애인들의 삶을 더 어려운데….




이제 다시 고민한다. 2008년도 희망을 말할 수 있는가? 법과 그 집행의 다른 발걸음 속에서 희망이라는 구름에 가린 달을 응시한다.









칼럼니스트 이계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