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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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도자립센터 작성일09-01-29 18:04 조회874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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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인간들의 뜨거운 관계를 위하여
2000년대의 가장 큰 성과는 아마도 ‘나쁜’ 장애인의 출현이 아닐까? 그 순하고 착한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는데 ‘일반’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쁜 인간이 된다는 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힘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결코 나쁜 인간이 될 수 없다. 결국 나쁠 수 있다는 건 곧 자유롭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는 셈이다. 타락천사 루시퍼는 신을 배신해 추방당했지만,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했고, ‘나쁜’ 장애인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굳이 착하게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주체적인 삶의 가치와 신념을 믿고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더 많은 나쁜 장애인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장애인들이 힘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 인식될 것이고, 원치도 않는 도움을 베풀며 자기만족 하는 착한 봉사자 언니오빠누나 들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른 인간의 출현도 기대해 본다. 즉 ‘야한’ 장애인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너무나 ‘숭고한’ 것을 바란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하고 감동적인 관계들이 존재한다. 이성임에도 서로 그 어떤 에로스적인 충동보다 더 월등한 동지애, 우정, 의리를 나누는 사이들, 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초월해 예술이나 신념에 대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 관계들. 실제로 그런 관계들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종종 확인하게 된다. 서로 영혼만을 교감하며 편지를 통해 문학과 철학을 논했던 여-남의 관계들에서, 얼마나 멋지고 숭고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가!
그러나 그것들이 ‘숭고한’ 이유는 그만큼 현실에서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성애자/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맞는 이성/동성과 함께 친해지고 가까워진다면, 자연스레 에로스적인 욕망에 끌리게 된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 또는 단순히 업무나 학업적인 측면에서도 공통의 목표를 위해 활동하지만, 그런 활동을 통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되고,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설명한 ‘숭고한’ 관계만큼 특별하고 멋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저차원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욕구에 기반해서 지금까지 존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복지관이나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소위 ‘자원봉사자’로 이성/동성을 처음 만나게 되는 이성애/동성애 장애인들도, 당연히 그들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깊은 대화를 통해 성적인 끌림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이 ‘사랑고백’을 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상대방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단지 ‘내 스타일이 아닌 동성/이성’이 고백을 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그가 바라던 고결하고 아름다운 수호천사-착한 아이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랑에 빠질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에 초월적이고 고상한 인간과 인간의 우정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략 답변은 이렇게 돌아온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좋은 동료, 친구, 정치, 종교적 동반자로 남기를 바랐다.”
어떤 집단에 속한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를 받곤 한다. 그래서 누군가와 친해지고, 그와 많은 것을 교감한다. 그는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고, 여러 가지 요구들을 수용해준다. 그러나 그렇게 가깝게 지내다 성적인 끌림을 느끼게 되면 “도대체 왜 그러냐”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아니, 설마 내가 널 ‘이성’으로 좋아해서 잘 해준 거라고 생각한거냐?” - 뭐 이런 반응?)
이성애자인 나에게도 이런 ‘숭고하고 고매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성친구들이 여럿 있다.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고, 책을 함께 읽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단지 ‘친구’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결코 ‘성적 관심’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건 우리들의 이 고상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큰 잘못이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그런 반응을 나에게 보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라리 “넌 내 스타일이 아냐”라고 말해준다면 고백하기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숭고함을 뒤집어쓴 이런 관계들의 일부는, 사실 장애인의 무성성(asexuality)에 의지해 자기 삶에 하나의 ‘고상함’을 심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의 욕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희망찬 새해를 맞아 이제는 좀 ‘야한’ 장애인의 시대를 선포해야겠다. “너 왜그래. 우리 사이 정말 좋았는데.. 왜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었어..”라고 나의 숭고한 동반자가 말한다면, 이제 좀 땅으로 내려오라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그런 건 교회나 바티칸 대성당 벽화에서나 느끼고, 옆에 있는 나의 존재는 뜨거운 피가 신체를 감도는, 이 지상에서 진화해 온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야한’ 장애인은 단지 인간의 모든 관계를 섹스로 매개하고자 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야한 장애인 되기는 장애인과 (주로) 비장애인의 관계를 지배하던 도덕적 억압과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을 탈피하고, 좀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구성되는 뜨거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위한 하나의 시도이어야 한다. 나쁜 장애인을 외치며 루시퍼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도 좀 내려올 차례가 된 것이다.
2000년대의 가장 큰 성과는 아마도 ‘나쁜’ 장애인의 출현이 아닐까? 그 순하고 착한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는데 ‘일반’ 시민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쁜 인간이 된다는 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힘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결코 나쁜 인간이 될 수 없다. 결국 나쁠 수 있다는 건 곧 자유롭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는 셈이다. 타락천사 루시퍼는 신을 배신해 추방당했지만,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렇게 세상은 변화했고, ‘나쁜’ 장애인들이 종종 등장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굳이 착하게 보이지 않아도, 자신의 주체적인 삶의 가치와 신념을 믿고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은 더 많은 나쁜 장애인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장애인들이 힘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 인식될 것이고, 원치도 않는 도움을 베풀며 자기만족 하는 착한 봉사자 언니오빠누나 들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른 인간의 출현도 기대해 본다. 즉 ‘야한’ 장애인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너무나 ‘숭고한’ 것을 바란다. 물론 세상에는 다양하고 감동적인 관계들이 존재한다. 이성임에도 서로 그 어떤 에로스적인 충동보다 더 월등한 동지애, 우정, 의리를 나누는 사이들, 성적으로 끌리는 것을 초월해 예술이나 신념에 대한 공감대를 기반으로 한 관계들. 실제로 그런 관계들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종종 확인하게 된다. 서로 영혼만을 교감하며 편지를 통해 문학과 철학을 논했던 여-남의 관계들에서, 얼마나 멋지고 숭고한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가!
그러나 그것들이 ‘숭고한’ 이유는 그만큼 현실에서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이성애자/동성애자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에 맞는 이성/동성과 함께 친해지고 가까워진다면, 자연스레 에로스적인 욕망에 끌리게 된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목적, 또는 단순히 업무나 학업적인 측면에서도 공통의 목표를 위해 활동하지만, 그런 활동을 통해 가까워지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성적으로 끌리게 되고, 그렇게 사랑에 빠지고는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설명한 ‘숭고한’ 관계만큼 특별하고 멋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저차원적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욕구에 기반해서 지금까지 존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복지관이나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통해서 소위 ‘자원봉사자’로 이성/동성을 처음 만나게 되는 이성애/동성애 장애인들도, 당연히 그들의 친절과 배려, 그리고 깊은 대화를 통해 성적인 끌림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이 ‘사랑고백’을 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상대방은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단지 ‘내 스타일이 아닌 동성/이성’이 고백을 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바로 그가 바라던 고결하고 아름다운 수호천사-착한 아이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사랑에 빠질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에 초월적이고 고상한 인간과 인간의 우정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략 답변은 이렇게 돌아온다.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좋은 동료, 친구, 정치, 종교적 동반자로 남기를 바랐다.”
어떤 집단에 속한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를 받곤 한다. 그래서 누군가와 친해지고, 그와 많은 것을 교감한다. 그는 장애인의 활동을 보조하고, 여러 가지 요구들을 수용해준다. 그러나 그렇게 가깝게 지내다 성적인 끌림을 느끼게 되면 “도대체 왜 그러냐”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아니, 설마 내가 널 ‘이성’으로 좋아해서 잘 해준 거라고 생각한거냐?” - 뭐 이런 반응?)
이성애자인 나에게도 이런 ‘숭고하고 고매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성친구들이 여럿 있다.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고, 책을 함께 읽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단지 ‘친구’이상의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지만, 결코 ‘성적 관심’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건 우리들의 이 고상한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큰 잘못이 아닐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그런 반응을 나에게 보일까봐 두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라리 “넌 내 스타일이 아냐”라고 말해준다면 고백하기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숭고함을 뒤집어쓴 이런 관계들의 일부는, 사실 장애인의 무성성(asexuality)에 의지해 자기 삶에 하나의 ‘고상함’을 심고자 하는 몇몇 사람들의 욕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희망찬 새해를 맞아 이제는 좀 ‘야한’ 장애인의 시대를 선포해야겠다. “너 왜그래. 우리 사이 정말 좋았는데.. 왜 나한테 그런 마음을 품었어..”라고 나의 숭고한 동반자가 말한다면, 이제 좀 땅으로 내려오라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그런 건 교회나 바티칸 대성당 벽화에서나 느끼고, 옆에 있는 나의 존재는 뜨거운 피가 신체를 감도는, 이 지상에서 진화해 온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야한’ 장애인은 단지 인간의 모든 관계를 섹스로 매개하고자 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야한 장애인 되기는 장애인과 (주로) 비장애인의 관계를 지배하던 도덕적 억압과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을 탈피하고, 좀 더 자유롭고 주체적인, 그리고 다양한 맥락에서 구성되는 뜨거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위한 하나의 시도이어야 한다. 나쁜 장애인을 외치며 루시퍼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으로도 좀 내려올 차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