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이 두렵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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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도자립센터 작성일09-04-16 19:39 조회872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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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불황 속에 장애인들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지고 창업을 하려는 장애인도 줄어들었다. 힘든 시기에도 자립생활을 위해 동분서주한 3명의 창업장애인을 만나 그동안 어떤 과정을 통해 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는지 들어봤다.
박종윤/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 대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기에 항상 보람 있다는 박종윤(44) 대표. 그는 근육에 힘이 없어지는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지체 1급의 장애인이다. 하지만 그가 장애인이라고 비장애인보다 실력이 뒤처지거나 말주변이 부족하지 않다.
박 대표는 군대를 다녀온 후부터 몸에 이상이 있었고, 30대 초반부터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3년 정도 지내다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때부터 그는 사회복지 공부와 자립을 위한 준비를 해오다가 마침내 2004년 7월에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을 결성했다.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은 후원에 의지하지 않고 전문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인쇄-디자인 업무를 통해 자립적인 삶을 실현하고 있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결성한 공동체다. 인쇄-디자인 업무를 하는 그린기획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해 작업을 하고 있다.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사업이라기보다도 뭔가를 해나간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곳입니다. 제가 가진 장애가 중증이다보니 항상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 어려움도 따릅니다. 그때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어 저는 매우 든든합니다.”
박 대표와 함께 일하는 동료 장애인은 3명. 인터뷰 중 만난 김봉균 대리는 뇌병변 3급 장애인이었다. 김 대리는 박 대표에게 디자인을 배워 지금은 스승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뽐내고 있다.
“비장애인보다 2~3배의 작업 시간이 걸리다보니 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요. 밤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죠. 낮엔 물건도 직접 배달하고 거래처 개발을 위해 항상 동분서주하구요. 아직까지 영업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작년 매출이 2억 정도라는 그린기획은 명함, 봉투를 시작으로 각종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기획한다. 현재 학교나 일반 기업체 2~3곳을 주 거래처로 일을 하고 있지만 수익을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린기획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투자해요. 물론 저와 김 대리도 함께 생활하죠. 당장 월급을 많이 챙겨줄 만큼의 수익은 없어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지금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 더 좋은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박 대표는 앞으로 좀 더 기술을 배워서 고급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또 그가 꿈꾸는 것은 장애인생활체육의 장을 여는 것. 수익사업의 활성화가 이뤄지면 주위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활동하고 꿈을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자립하고 싶은 장애인들이 있다면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리 겁먹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늘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말이죠.” 박 대표는 여러 장애인들에게도 현실성 있는 일을 찾아 매사에 노력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동생활가정인 푸른초장에서는 함께 생활할 장애인을 모집한다. 건강 상태에 따라 이용요금을 내고 그린기획에서 일을 배우거나 타 직장 일을 하면서 함께 지낼 장애인을 찾고 있다.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장애인은 032-556-9329로 연락하면 된다.
박용월 / CF안마시술소 원장
“안마라고 하면 퇴폐업소라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뉴스나 신문에서도 유사업종을 안마라고 잘못 표현해서 피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해요.”
인천시 연수구에서 안마시술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용월(51, 시각1급) 원장은 세 살 때 홍역을 앓아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병원을 못 갈 정도로 가난했던 그녀는 3일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오가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박 원장은 안마를 하면서 가난한 집을 이끌어가는 가장 노릇을 했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성공으로 가기 위한 길은 험하다고 했던가. 그녀는 결혼에 실패하고 남편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앞이 막막했던 박 원장은 약을 먹고 죽음을 선택했는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게 됐다.
“그때부터예요. 더 열심히 더 악착같이 살겠다는 다짐을 했죠. 몇 년 간 안마를 열심히 해서 남편의 빚을 다 갚았어요. 그때의 그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힘든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 더 단단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박 원장은 지난 92년도 안산에서 안마시술소를 시작했다. 처음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작한 안마시술소는 생각보다 번창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된 것은 아니다. 첫 달에는 달세 800만원을 못 내서 힘들기도 했고, 손님을 모으기 위해 직접 영업도 뛰고 주위 공단으로 명함을 돌리러 가기도 했다. 한창 사업이 번창하다가 수입이 줄어들 즈음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안마시술소를 개업했다. 박 원장의 안마시술소는 2002년부터 인천에 자리를 잡아 올해로 7년째에 접어들지만 계속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국민지킴이안마라는 명칭으로 시각장애인 18명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쓰고 있어요. 장소도 마련돼 있고 최저 임금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고용지원센터에 신청을 해뒀죠. 4월 말경에 결정이 나는데…이번 일이 잘 돼서 인천지역의 모든 안마사들에게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 원장이 운영하는 또 하나의 사업체는 행복한노후방문요양센터.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이곳은 그녀가 평소 관심을 많이 갖는 노인분들을 대하는 곳이다. 현재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있는 박 원장의 효심도 대단했다.
“앞으로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무시를 받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못하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해드릴 생각이에요. 또 앞을 전혀 못보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65세가 넘으면 그동안 지원되던 바우처 서비스가 본인부담금도 늘어나고 시간도 줄어들어요. 이런 문제점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박 원장은 항상 쉴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그것이 그녀가 여기까지 오게 해준 밑거름이라고 했다. 부족할지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월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집에만 있지 마시고 밖으로 나와 보세요. 각 구별로 활동할 수 있는 협회나 모임이 많이 있어요. 스스로 나와 함께 한 목소리를 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봐요.”
박 원장은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안마사협회와 행복한노후요양센터, CF안마시술소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제 실력을 타인을 위해 발휘하고 싶어요”
방칠성 / 토탈패션 옷 수선 사장
인천 남부초등학교 앞 할인마트 안쪽에 마련된 8평 남짓한 공간. 방칠성(57, 지체3급) 사장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그는 9살 때 피난을 와 숙박업, 봉재공장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
“처음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스승을 잘 만난 덕이었죠.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봉재, 미싱 등 거기서 만난 선생님에게 기술을 배웠어요. 그렇게 옷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4살 때 원두막에서 떨어져 장애를 갖게 된 방 사장은 인천시 남구 숭의동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한다. 비나 눈이 오면 버스를 이용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방 사장의 하루는 아침 9시 가게 문을 열면서 시작된다. 올해로 6년 째 운영해 온 이곳을 찾는 고객은 하루 평균 6명 꼴. 그는 식구가 많을 경우 옷 수선 가게를 창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장애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만큼 여건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일을 하기 위한 기술도 갖춰야 하는데 교육 받을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장애인이나 장애인 가족이 재단 등 옷 수선에 관련된 일을 배우고 싶어 한다면 도와드리려고 해요.”
방 사장은 이미 지난 2001년 비장애인 두 명에게 기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는 보통 하루 2시간 씩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싶다고 한다. 미싱을 돌릴 줄 아는 경우라면 더욱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 사장은 사업 뿐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벌써 인천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10년째 나가고 있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냐고 묻자 그는 1990년대 즈음 서울시 노원구신체장애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을 때 했던 봉사라고 했다.
“밖을 나오지 못하는 1급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 남이섬으로 나들이를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날 나들이를 다녀온 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너무 즐거웠다며 다음에 또 가자는 전화가 빗발쳤거든요. 그때 얼마나 기쁘고 보람됐는지 몰라요.”
그는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봉사활동을 간다. 물론 그만큼 경제적인 손실은 있지만 봉사활동으로 얻어오는 기쁨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방 사장은 앞으로도 재가장애인들을 사회로 인도하는 일을 할 계획이다.
방 사장의 부인도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3급 장애인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장애인이라고 놀림을 받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주택, 일자리 창출, 교육 등의 지원이 이뤄지길 바랐다.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합니다. 저는 장애인의 날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장애인의 날을 만들어 놓는 건 오히려 차별이라고 생각되네요. 비장애인의 날은 없지 않습니까?”
박종윤/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 대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기에 항상 보람 있다는 박종윤(44) 대표. 그는 근육에 힘이 없어지는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는 지체 1급의 장애인이다. 하지만 그가 장애인이라고 비장애인보다 실력이 뒤처지거나 말주변이 부족하지 않다.
박 대표는 군대를 다녀온 후부터 몸에 이상이 있었고, 30대 초반부터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 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3년 정도 지내다가 뭔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때부터 그는 사회복지 공부와 자립을 위한 준비를 해오다가 마침내 2004년 7월에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을 결성했다.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은 후원에 의지하지 않고 전문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인쇄-디자인 업무를 통해 자립적인 삶을 실현하고 있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결성한 공동체다. 인쇄-디자인 업무를 하는 그린기획은 인천시 계양구 계산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해 작업을 하고 있다.
“금전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사업이라기보다도 뭔가를 해나간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곳입니다. 제가 가진 장애가 중증이다보니 항상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하는 어려움도 따릅니다. 그때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있어 저는 매우 든든합니다.”
박 대표와 함께 일하는 동료 장애인은 3명. 인터뷰 중 만난 김봉균 대리는 뇌병변 3급 장애인이었다. 김 대리는 박 대표에게 디자인을 배워 지금은 스승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뽐내고 있다.
“비장애인보다 2~3배의 작업 시간이 걸리다보니 퇴근 시간이 따로 없어요. 밤까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죠. 낮엔 물건도 직접 배달하고 거래처 개발을 위해 항상 동분서주하구요. 아직까지 영업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작년 매출이 2억 정도라는 그린기획은 명함, 봉투를 시작으로 각종 인쇄물을 디자인하고 기획한다. 현재 학교나 일반 기업체 2~3곳을 주 거래처로 일을 하고 있지만 수익을 내기에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린기획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공동생활가정에 투자해요. 물론 저와 김 대리도 함께 생활하죠. 당장 월급을 많이 챙겨줄 만큼의 수익은 없어 항상 미안한 마음이지만 지금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 더 좋은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박 대표는 앞으로 좀 더 기술을 배워서 고급스러운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또 그가 꿈꾸는 것은 장애인생활체육의 장을 여는 것. 수익사업의 활성화가 이뤄지면 주위 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활동하고 꿈을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에서다.
“자립하고 싶은 장애인들이 있다면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미리 겁먹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늘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말이죠.” 박 대표는 여러 장애인들에게도 현실성 있는 일을 찾아 매사에 노력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장애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동생활가정인 푸른초장에서는 함께 생활할 장애인을 모집한다. 건강 상태에 따라 이용요금을 내고 그린기획에서 일을 배우거나 타 직장 일을 하면서 함께 지낼 장애인을 찾고 있다. 함께 하기를 원하는 장애인은 032-556-9329로 연락하면 된다.
박용월 / CF안마시술소 원장
“안마라고 하면 퇴폐업소라고 잘못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뉴스나 신문에서도 유사업종을 안마라고 잘못 표현해서 피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해요.”
인천시 연수구에서 안마시술소를 운영하고 있는 박용월(51, 시각1급) 원장은 세 살 때 홍역을 앓아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병원을 못 갈 정도로 가난했던 그녀는 3일 동안 죽음의 문턱까지 오가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박 원장은 안마를 하면서 가난한 집을 이끌어가는 가장 노릇을 했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성공으로 가기 위한 길은 험하다고 했던가. 그녀는 결혼에 실패하고 남편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앞이 막막했던 박 원장은 약을 먹고 죽음을 선택했는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게 됐다.
“그때부터예요. 더 열심히 더 악착같이 살겠다는 다짐을 했죠. 몇 년 간 안마를 열심히 해서 남편의 빚을 다 갚았어요. 그때의 그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힘든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 더 단단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박 원장은 지난 92년도 안산에서 안마시술소를 시작했다. 처음 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작한 안마시술소는 생각보다 번창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된 것은 아니다. 첫 달에는 달세 800만원을 못 내서 힘들기도 했고, 손님을 모으기 위해 직접 영업도 뛰고 주위 공단으로 명함을 돌리러 가기도 했다. 한창 사업이 번창하다가 수입이 줄어들 즈음 인천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안마시술소를 개업했다. 박 원장의 안마시술소는 2002년부터 인천에 자리를 잡아 올해로 7년째에 접어들지만 계속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국민지킴이안마라는 명칭으로 시각장애인 18명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힘쓰고 있어요. 장소도 마련돼 있고 최저 임금도 보장받을 수 있도록 고용지원센터에 신청을 해뒀죠. 4월 말경에 결정이 나는데…이번 일이 잘 돼서 인천지역의 모든 안마사들에게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 원장이 운영하는 또 하나의 사업체는 행복한노후방문요양센터. 인천시 남동구에 위치한 이곳은 그녀가 평소 관심을 많이 갖는 노인분들을 대하는 곳이다. 현재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있는 박 원장의 효심도 대단했다.
“앞으로 양로원을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나이가 들어 무시를 받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못하시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해드릴 생각이에요. 또 앞을 전혀 못보는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65세가 넘으면 그동안 지원되던 바우처 서비스가 본인부담금도 늘어나고 시간도 줄어들어요. 이런 문제점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박 원장은 항상 쉴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그것이 그녀가 여기까지 오게 해준 밑거름이라고 했다. 부족할지라도 노력하는 사람에게 세월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집에만 있지 마시고 밖으로 나와 보세요. 각 구별로 활동할 수 있는 협회나 모임이 많이 있어요. 스스로 나와 함께 한 목소리를 내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봐요.”
박 원장은 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안마사협회와 행복한노후요양센터, CF안마시술소를 다니며 행복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제 실력을 타인을 위해 발휘하고 싶어요”
방칠성 / 토탈패션 옷 수선 사장
인천 남부초등학교 앞 할인마트 안쪽에 마련된 8평 남짓한 공간. 방칠성(57, 지체3급) 사장의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그는 9살 때 피난을 와 숙박업, 봉재공장 등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왔다.
“처음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건 스승을 잘 만난 덕이었죠.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봉재, 미싱 등 거기서 만난 선생님에게 기술을 배웠어요. 그렇게 옷과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4살 때 원두막에서 떨어져 장애를 갖게 된 방 사장은 인천시 남구 숭의동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출퇴근을 한다. 비나 눈이 오면 버스를 이용하지만 불편한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에는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방 사장의 하루는 아침 9시 가게 문을 열면서 시작된다. 올해로 6년 째 운영해 온 이곳을 찾는 고객은 하루 평균 6명 꼴. 그는 식구가 많을 경우 옷 수선 가게를 창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했다.
“장애인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그만큼 여건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일을 하기 위한 기술도 갖춰야 하는데 교육 받을 기회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장애인이나 장애인 가족이 재단 등 옷 수선에 관련된 일을 배우고 싶어 한다면 도와드리려고 해요.”
방 사장은 이미 지난 2001년 비장애인 두 명에게 기술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는 보통 하루 2시간 씩 3개월에서 길게는 6개월 정도의 시간을 투자해 장애인의 자립을 돕고 싶다고 한다. 미싱을 돌릴 줄 아는 경우라면 더욱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방 사장은 사업 뿐 아니라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벌써 인천시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10년째 나가고 있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냐고 묻자 그는 1990년대 즈음 서울시 노원구신체장애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을 때 했던 봉사라고 했다.
“밖을 나오지 못하는 1급 장애인 분들을 모시고 남이섬으로 나들이를 나갔던 적이 있어요. 그날 나들이를 다녀온 날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너무 즐거웠다며 다음에 또 가자는 전화가 빗발쳤거든요. 그때 얼마나 기쁘고 보람됐는지 몰라요.”
그는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봉사활동을 간다. 물론 그만큼 경제적인 손실은 있지만 봉사활동으로 얻어오는 기쁨이 더 소중하다고 했다. 방 사장은 앞으로도 재가장애인들을 사회로 인도하는 일을 할 계획이다.
방 사장의 부인도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3급 장애인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장애인이라고 놀림을 받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많은 장애인들에게 주택, 일자리 창출, 교육 등의 지원이 이뤄지길 바랐다.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라고 합니다. 저는 장애인의 날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장애인의 날을 만들어 놓는 건 오히려 차별이라고 생각되네요. 비장애인의 날은 없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