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녀’로 강간죄 객체를 제한하던 규정이 ‘사람’으로 개정되면서, 성범죄는 단순히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22일 국회는 친고죄 규정이 담긴 형법 아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등 총 5개의 법 개정안을 대거 통과시켰다. 60여년간 피해자에게 ‘악질 조항’으로 불리우던 친고죄 폐지를 비롯해 강간죄 성립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되고, 피해자 보호 및 가해자 통제 규범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 개정안들은 오는 6월 19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중 성폭력 범죄의 사각지대라고 불리울 만큼 크게 노출되어 있던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한 내용도 상당히 포함됐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김정혜 객원 연구원의 ‘성폭력피해자 권리 보장 관련 개정법 평가’ 발제문을 토대로 상반기부터 달라질 성폭력 관련 조항들을 살펴봤다.
공소 제기 제한 규정 완화
■친고죄 삭제=먼저 형법 및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특례법)’에 남아있던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 조항이 전면 삭제됐다. 이에 따라 친고죄의 예외조항이었던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상의 반의사불벌 규정도 삭제됐다. 아청법은 형법 및 특례법의 친고 조항에도 불구하고, 19세 미만에 대한 성폭력 범죄에 대해 친고죄 적용을 배제하고, 반의사불벌로 예외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원칙 조항인 형법상 친고죄 조항이 삭제되면서 19세 미만에 대한 반의사불법 또한 폐지됐다. 지금은 성범죄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수사와 재판이 가능하지만, 6월부터는 친고죄가 폐지돼 고소 없이도 수사와 재판이 가능하다. 반의사불벌죄도 함께 폐지되면서 피해자가 원치 않아도 처벌할 수 있게 된다. ■공소시효 적용 배제 대상 확대=특례법과 아청법은 13세 미만 여성, 장애 여성에 대한 형법 상 강간죄, 준강간죄의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특례를 두고 있다. 이번 개정으로 공소시효가 배제되는 피해자 범위와 해당 범죄의 종류가 대폭 늘어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3세 미만, 장애인에 대한 범죄로는 기존의 강간죄, 준강간죄 뿐 아니라 강제추행, 준강제추행, 강간 등 상해·치상, 강간 등 치사, 장애인·13세 미만 유사강간죄를 포함하게 됐다. 강간 등 살인죄는 피해자의 연령 및 장애 여부에 따른 제한 없이 모든 피해자에 대해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장애인에 대한 형법상 준강간·준강제추행죄는 공소시효 배제 대상이 되지만, 특례법 제6조 제4항에 따른 장애인 준강간·준강제추행죄는 특례법 제21조 제3항의 특례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에 장애인준강간·준강제추행의 공소시효가 도과되면 형법상의 준강간·준강제추행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형법 제299조로 기소가 가능하다.
이번 법 개정으로 인해 강간죄 객체에 남성이 포함됐고, 장애인준강간의 적용 여지가 확대됐다. ■강간죄 객체에 남성 포함…형법에 유사강간죄 신설=강간죄의 객체에 남성을 포함하고, 형법에 유사강간죄를 신설했다. 개정 이전 형법은 음행매개죄, 추업사용목적부녀매매죄, 강간죄, 업무상위력 등에 한 간음죄, 13세 미만 간음·추행죄, 강도강간죄, 해상강간죄와 같은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부녀’로 제한하고 있다. 이에 따라 특례법에서도 강간 및 간음 행위의 객체를 ‘여성’으로 하고 있었다. 이번 개정에 따라 형법 및 특례법의 성폭력 범죄의 객체를 모두 ‘사람’으로 변경함으로써 남성도 강간 및 간음 행위의 객체에 포함시켰다. 또한 형법에 폭행, 협박으로 구강, 항문 등 신체 내부에 성기를 넣거나 항문에 손가락 등 신체 일부 또는 도구를 넣는 행위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유사강간죄를 신설했다. 법정형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다. 이번 형법 개정에 따라 19세 미만, 장애인에게만 적용되던 유사강간죄를 비장애 성인까지 확대시켰다. ■장애인준강간죄의 요건에 ‘항거곤란’ 추가=장애인준강간 조항은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해 여자를 간음한 행위’에서 지난 2011년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해 형법 제299조의 죄를 범하는 행위’로 변경 됐었다. 이번 개정에서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해 사람을 간음하는 행위’로 수정됐다. 기존 재판부에서는 ‘항거불능’은 저항의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함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번 개정은 항거불능 외에 항거곤란을 추가함으로써, 저항의 곤란함이 ‘현저한’ 수준에 이르지 않더라도 장애인준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구성요건을 완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법률조력인 지원 대상 및 권한 확대=지난해 3월부터 시행된 법률조력인 제도는 아청법에 따라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피해자에 대해서만 적용됐다. 이번 개정에 따라 법률조력인 제도의 근거규정을 특례법으로 옮김으로써 모든 연령대의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법률조력인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조사 및 절차에 출석, 참여할 권리에 대해 ‘의견진술권’을 명시했고, 구속 전 피의자심문, 공판준비절차 출석권 및 의견진술권이 신설됐다.
■진술조력인 제도 도입=특례법에 따른 진술조력인 제도가 도입됐는데, 법무부의 진술조력인 양성과정을 거쳐 오는 12월 19일부터 시행된다. 진술조력인은 의사소통 및 의사표현에 어려움이 있는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에 대한 형사사법절차에서의 조력을 목적으로 도입된 인적 지원 제도다. 이 진술조력인은 13세 미만 아동 또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의사소통, 의사표현에 어려움이 있는 피해자의 조사 및 신문에 참여해 의사소통을 중개,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조사 전에 피해자를 사전 면담하고 조사 시 진술조력인의 조력이 필요한 지 여부에 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며, 조사과정에 참여한 뒤 피해자의 의사소통, 표현, 능력, 특성 등에 관한 의견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제출 할 수 있다. 현재 진술조력인과 유사한 제도로 진술조사참여전문인력이 있다. 이 진술조사참여전문인력은 수사 단계에서만 참여할 뿐 재판 단계에서 참여는 불가능하고 법률상 근거규정이 없어 잘못된 진술조사를 예방하기 위한 사전적 참여 권한이 없다.
■피해자 보호시설의 세분화 및 입소기간 연장=먼저 성폭력피해자 보호시설을 일반보호시설, 장애인보호시설, 장애인 자립지원 공동생활시설, 특별지원 보호시설, 자립지원 공동생활시설로 각각 세분화 됐다. 기존의 보호시설 입소기간은 기본 6개월이며 1년 6개월 연장할 수 있었다. 장애인보호시설의 경우 기본 2년, 피해회복에 소요되는 기간 동안 연장해 머무를 수 있다. 장애인 자립지원 공동생활시설도 기본으로 2년, 추가로 1회 2년을 연장할 수 있다.